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몇 개월의 시간이 떴다. 그때 나는 셋톱박스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에서 품질 테스트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루 종일 리모컨으로 TV 프로그램을 이리저리 작동시켜 보고 버그를 찾는 정말 지난하고도 지난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가보지도 않은 도시 파리에 꽂혀 있었다.

그때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나는 옷을 정말 좋아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옷 환자(?)들이 그러하듯 옷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미술과 건축, 그 밖의 여러 미적인 것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넓어졌다.

그 무렵 우연히 읽었던 책 중 하나가 김환기의 삶을 다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였다.

나는 조금 거꾸로 김환기의 그림보다 그의 삶을 먼저 좋아하게 된 경우다. 특히 아내 김향안과 함께했던 파리 생활이 기억에 남았다. 한국전쟁 직후, 안 그래도 척박한 시기에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작업을 이어가며 살아가는 두 사람의 일상은 사실 낭만과는 거리가 멀고 처참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당시의 내게는 그런 고단한 삶마저 이상하게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그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전에는 별다른 감흥 없이 보았던 그림들도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을 이해해서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이 좋아서 그림까지 좋아진 셈이다.

비슷한 시기에 김중업 건축가도 알게 됐다. 김중업도 한국전쟁 이후 파리로 건너가 르 코르뷔지에의 아틀리에에서 일했던 사람이다. 그 시기의 한국 건축가가 머나먼 파리에서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일했다는 사실이 당시의 내게는 마냥 근사하게 느껴졌다.

김환기는 1956년 아내 김향안과 함께 파리로 건너가 3년가량 머물며 작업했고, 김중업은 그보다 앞서 파리에서 새로운 건축을 배우고 있었다.

분야도, 그곳에서 보낸 시간도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세계를 넓히기 위해 파리로 향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렇게 동경하던 두 사람의 삶을 디깅하다 보니 어느새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궁금해졌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내 삶은 우디 앨런 영화 속 인물들처럼 시궁창 같은 현실을 잊기 위한 환상으로 가득했다. 하루 종일 의미 없는 일들로 시간을 죽이다가도 머릿속으로는 파리의 낡은 골목을 걷고 있었다.

그런 생활을 몇 달쯤 이어가다 결국 파리행 비행기 표를 샀다. 왕복 83만 원. 몇 달 동안 모은 아르바이트 월급으로 마련한, 당시의 내게는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다.

여행 중 유일하게 반복했던 일과는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괜찮아 보이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좋았다.

한겨울이면 검은색 패딩, 그것도 노스페이스냐 아니냐 정도로 구분되던 당시 서울의 거리와 달리 파리에는 정말 다양한 차림의 사람들이 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옷을 입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내 시선을 끈 건 노신사들의 발목이었다.

정말 오래 신은 듯한 파라부트 샴보드에 빨간색이나 보라색 양말을 신고 있었다. 구두에는 주름이 깊게 잡혀 있었고 가죽은 군데군데 색이 바래 있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파리에서 본 노신사들의 발목처럼, 10년이 지난 샴보드
② 파리에서 본 노신사들의 발목처럼, 10년이 지난 샴보드

한국에서도 뽀빠이 매거진을 통해 파라부트를 자주 봤다. 당시 나는 아키오 하세가와(Akio Hasegawa)의 스타일링을 정말 좋아했다. 잡지 속에서 자주 스타일링된 파라부트는 내게 굉장히 팬시한 구두였다.

그런데 정작 파리에 와서 보니 한국의 금강제화 같은 구두 브랜드에 가까워 보였다. 특별한 패션 아이템이라기보다 그저 오래전부터 신어온 구두 같은 느낌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멋을 내기 위한 물건이 아니라 그냥 평생 신어온 구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오히려 더 멋있었다.

결국 홀린 듯이 숙소 근처 마레 지구의 파라부트 매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300유로쯤을 지불하고 샴보드를 샀다. 여행 경비도 넉넉하지 않았고 당시 나에게는 정말 큰돈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구두만큼은 꼭 사야 할 것 같았다.

어느새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마레 지구의 작은 매장에서 산 구두
③ 마레 지구의 작은 매장에서 산 구두

지금의 구두는 그때 내가 동경했던 어느 할아버지의 구두보다도 더 낡아 보인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낡은 구두를 갖게 되고 나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했던 건 정말 그 낡은 구두였을까. 아니면 그런 구두를 신고도 멋있어 보이던, 자연스럽게 나이 든 사람의 모습이었을까.

어쩌면 나는 구두가 오래되는 것과 사람이 멋지게 나이 드는 것을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래 신으면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처럼.

당연히 구두만 오래 신는다고 그런 사람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파리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사라진 지는 오래고, 옷을 대하는 마음도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 시절 파리를 꿈꾸며 지루한 하루를 버티던 나와 마레 지구의 작은 매장에서 구두를 사던 나는 여전히 이 낡은 구두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는 노스탤지어란 고통스러운 현재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지금의 나는 무언가를 동경하던 그 시절의 나를 그리워하며 현재를 부정해 본다.